과천 빚쟁이

정형돈의 “강북멋쟁이”를 개사해 봤습니다.

미국은 버냉키 헬기가 있고
일본은 아베의 윤전기 있고
유럽은 올란드 세금이 있고
한국은 과천의 빚쟁이 있지

막 쓰고 건설해도 회계엔 없고
막 꿔줘도 이율은 낮추면 되고
막 부어도 환율은 꿈쩍도 않는
쓸데없이 과대지출 과천 빚쟁이

공사에 막 넘기고 회계를 빼고
별 거 없이도 빚이 는다 국채 없이도~
정권에 퍼줄거냐 쫀심이 있지
5년만 버티면돼 니네는 쫀심도 없냐~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랄라라 라랄라랄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과천빚쟁이)

(과천빚쟁이)

(NA)

다 다른 빚으로 사는 거지
다 똑같은 기준에 다 똑같은 회계법
자기 색깔을 가져
우리 과천 빚쟁이처럼

돈 없는걸 어쩌란 말인가 (빚쟁이~)
돈 없는걸 어쩌란 말인가

맨날 느는 빚 어쩌란 말인가 (빚쟁이~)
맨날 느는 빚 어쩌란 말인가

자꾸 지르는 걸 어쩌란 말인가 (빚쟁이~)
자꾸 지르는 걸 어쩌란 말인가

증세는 싫다는 걸 어쩌란 말인가 (빚쟁이~)
증세는 싫다는 걸 어쩌란 말인가

(과천빚쟁이~)

(과천빚쟁이~)

(과천빚쟁이~)

이번 헌법재판소 낙태죄 합헌 결정에 대한 간단한 해설문.

링크: 헌법재판소의 결정 요약문(2010헌바420)

주의: 이번 글은 쉽게 쓰기 위해서 법적 형식논리는 상당부분 일부러 빼 놓고 썼습니다. 위 링크의 원문이 훌륭하게 요약되어져 있으므로 그 부분은 원글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 끝에는 네줄요약을 해 놨으므로 시간이 없으신 분이라면 그 쪽부터 읽으면 되겠습니다.

이번 헌법소원소송에서 다룬 조항은 두 개입니다. 일단 사건에서 문제된 조산사의 낙태를 무조건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제1항입니다. 그런데 이 조항은 형법상 자기낙태죄(제269조 제1항)이 위헌으로 무효라면 당연히 무효가 되므로, 자기낙태죄도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에서 위헌 여부를 다루었습니다. 즉 임부 자신이 낙태하는 게 범죄가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걸 도와준 이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이들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된 것)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이번 결정(판례)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선 부분이 바로 이 자기낙태죄, 임부가 스스로 낙태하는 행위를 범죄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부분입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문제는 두 개의 권리가 충돌합니다. 이번 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태아의 생명권과 임부의 자기결정권입니다. 풀어 말하면 임부 자신이 낳기 싫겠다고 하여 태아를 죽이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 아닌가 입니다. 일단 사람 하나가 자기가 싫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태아를 어디까지 보호받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가 됩니다. 일단 두 입장이 대립합니다.

(합헌의견)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헌법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으로 될 예정인 생명체라는 이유 때문이지, 그것이 독립하여 생존할 능력이 있다거나 사고능력, 자아인식 등 정신적 능력이 있는 생명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태아가 독자적 생존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그에 대한 낙태 허용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인용자 주: 하지만 수정란이 경우에는 착상여부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생명권, 즉 인간여부를 부정합니다.)

요약: 잘만 크면 사람이 될 건데, 그런 아이인 생명체를 죽이자고?

(위헌의견) 현대 의학의 수준에서는 태아가 임신 24주에 이르기까지는 자존적 생존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으므로, 태아의 독자적 생존능력이 인정되는 임신 24주 이후에는 태아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과 어느 정도 동일시할 수 있으므로 임부의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임부의 생명이나 건강에 현저한 위해가 생길 우려가 있는 등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함이 바람직하다. (중략) 의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임신 초기(임신 1주-12주)의 태아는 사고나 자아인식, 정신적 능력과 같은 의식적 경험에 필요한 신경생리학적 구조나 기능들은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바, 임신 초기의 태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후략)

요약: 엄마의 일부로만 붙어있는 의식, 정신능력도 없는 세포덩어리를 사람으로 볼 순 없지.

합헌의견은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한 순간부터 생명권의 보호대상, 즉 인간으로 취급하자는 데 반해 위헌의견은 독자적 생존능력을 기준으로 임신 24주 이상이 되어야 인간으로 보자는 의견입니다. 다만 위헌의견은 임신 12주 이상부터는 태아가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낙태로 임부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을 수 있으니 임신 12주 이내에만 낙태를 기본적으로 허용하자는 입장입니다. 즉 헌재의 어느 의견을 따르더라도 임신 중기(임신12주~23주) 이후부터는 낙태가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헌재의 의견대립은 임신 초기(~임신12주)의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입니다. 낙태의 전면적 자유화는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대립점은 자기낙태죄가 낙태를 막는데 효과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현재 모자보건법은 몇몇 이유(임부의 건강에 치명적 영향, 근친상간, 강간등)가 있을 경우 임신 24주 이내에 한하여 의사가 낙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유에 대한 판단을 의사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게 해서 실상은 산부인과의 가장 큰 일거리가 낙태시술이 된 것이 현실입니다. 의사도 돈 벌어야 하는데 자기 혼자만 하면 되는 싸인 안 하기가 쉽지 않겠죠. 위헌의견은 자기낙태죄가 사실상 효력이 사라졌으니 돌팔이 낙태꾼들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태아가 사람도 아니고 임부의 건강과 생명에도 영향이 적은 임신 초기(~임신 12주) 이내의 의사가 안전하게 시술하는 낙태를 허용하는 편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임부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위헌의견) 형법상 낙태죄 규정이 현재는 거의 사문화되어 낙태의 근절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중략) 임신 초기의 낙태는 시술방법이 간단하여 낙태로 인한 합병증 및 모성사망률이 현저히 낮아지므로, 임신 초기에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낙태를 허용해 줄 여지가 크다. 불법낙태로 임부의 건강이나 생명에 위험이 초래되는 사태가 빈발하고 있어 그 대책이 시급한 현실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임신 초기에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낙태를 허용해 줄 필요성이 있다.

요약: 어차피 처벌해도 이리저리 다들 야매로까지 한다니깐? 그럴 바에는 안전한 한도에서 하고 싶다는 대로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지.

이에 대해서 합헌 의견은 낙태를 처벌하는 것 외에 피임 등 성교육이나 보육 지원만으로는 낙태를 줄이는데 충분하지 않고, 임신 초기의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할 경우 사회적 경제적 이유, 즉 부끄럽거나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낙태가 더욱 만연할 것을 우려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아직까지 자기낙태죄가 효력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합헌의견) 성교육과 피임법의 보편적 상용, 임부에 대한 지원 등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미연에 방지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불법적인 낙태를 방지할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중략)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경제적 사유로 인한 낙태로까지 그 허용의 사유를 넓힌다면, 자칫 자기낙태죄 조항은 거의 사문화되고 낙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풍조가 확산될 우려마저 없지 않다.

요약: 그래도 다른 방법들이 안 통하잖아. 그리고 결국 돈 없거나 부끄럽다고 사람 죽이는 걸 방치하자는 거냐? 하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는 못해주겠다.

위헌의견은 자기낙태죄 전체가 위헌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기 힘들고 임부 건강과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금지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입장입니다. 합헌의견은 어차피 지금 법률들로도 의학적, 윤리적으로 불가피한 낙태는 할 수 있는데 그 이상으로 낙태를 허용하면 결국은 부끄럽고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태아를 낙태하자는 것이니 거기까지는 허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결국 태아를 사람처럼 생명을 보호할 것인가,와 부끄럽거나 키우기 힘들다고 하는 낙태를 인정할 것인가가 대립점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가부장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헌재는 임부가 기혼인지 미혼인지, 미성년자인지 성년인지는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적 권리에 대한 논의 또한 없었지요. 태아를 사람과 비슷하게 생명권을 보호받아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 곧 가부장적이라 보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또한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인한 낙태 또한 반대할 근거가 있는 것이, 현행 형법은 갓 태어난 영아를 치욕을 은폐하거나 양육하기 힘들다고 하여 즉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살해하는 부모등을 명시적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251조, 영아살해죄) 결국 갓 낳은 핏덩이와 태아를 다르게 본다면 위헌, 비슷하게 본다면 합헌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현실적으로 임신 12주 이내의 낙태에 대해서는 자격을 갖춘 의사가 시술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허용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의학적, 윤리적 사유들과 사회적 경제적 사유들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요? 구체적으로 미성년자가 임신한 경우에 있어서 몇 살까지는 의학적으로 위험하고 그 이후는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육체적 생리적 성숙도는 개인차가 굉장히 큽니다. 또한 강간과 의도치 않은 원나이트는 어디까지가 강간이고 어디까지가 원나이트인가요? 이는 사실 확실한 폭력의 입증이 없는 한에는 여성 자신의 진술에 의존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매우 모호해서 현실적으로 한쪽만 허용하고 다른 쪽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 결과가 결국 합법적으로 탈을 쓴 사회적 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가 만연하는 현실입니다. 영아살해죄에 대해서는 낙태를 하지 않았으므로 분만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낙태 합법화를 전제로 하면 피해갈 수는 있습니다. 즉 모든 낙태를 금지하지 못한다면 안전을 조건으로, 임신 초기의 낙태는 허용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오히려 가부장적인 문제는 낙태를 허용했을 때 크게 불거집니다. 결혼한 상태인 임부의 경우, 낙태에 남편의 동의가 필요할까요? 또는 최소한 남편은 부인이 낙태를 한다는/했다는 것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어야 할까요? 이혼 시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낙태 경험이 위자료 산정에 고려되어야 할까요, 아닐까요.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부모 등의 친권자가 낙태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는 미성년인 임부는 낳고 싶어하는데 친권자는 낙태를 원하는 상황이 일반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가부장적인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프라이버시권(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도 걸립니다. 각종 의료보험 가입시 낙태 경험 여부는 보험사에 고지해야 하는 정보일까요? 다시 아이를 임신하여 낳고 싶을 때 낙태 경험을 산부인과 의사에게 알려야 할까요? 지금까지는 불법으로 인해서 낙태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는 셈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만, 낙태를 합법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를 한다면 이러한 부분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산사가 문제삼은 형법 제270조 제1항은 낙태금지를 전제한다면 의료지식이 있는 자가 낙태를 도운 것이므로 더 큰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헌재에 이견이 없었습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네 줄 요약 넣겠습니다.

  1. 태아를 언제부터 사람과 비슷하게 보호할 것인지는 그 근거를 “사람이 될 가능성”이냐, “생리적 정신적 독립성”이냐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립니다.
  2. 사회적 경제적 사유 즉 부끄럽거나 키울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할 것이냐. 이는 결국 1.의 입장에 따라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와 임부의 권리 아니냐로 의견이 갈립니다.
  3. 이 두 의견들 모두 임신 12주 이후의 낙태는 원칙적으로 금지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위헌의견에서는 임부의 생명과 건강을 그 주된 이유로 듭니다.
  4. 임신 초기 낙태를 합법화한다면 그 진료기록에 대한 보존, 공개, 고지 여부는 여러모로 굉장한 문제가 됩니다.

강준만이 쓴 “안철수의 힘” 독후감.

이 책은 두 권으로 나와야 했다. 머릿말과 맺는말은 빼고 본문이 모두 15장인데 이중 초반 8장은 안철수 비판론자들에 대한 답변이고, 나머지 7장은 민주통합당 대선경선후보들에 대한 비판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초반 8장은 안철수가 쓴 “안철수의 생각”의 별책부록으로 붙었어야 했고 후반 7장은 민주통합당 비판서로서 따로 나와야 하지 않았나 싶다.

강준만 교수(이하 직함 생략)의 고민이 이 상이한 두 부분을 한 권으로 묶은 데서 잘 드러난다. “안철수의 힘”이 제목인데 이는 “민주통합당 경선후보들에 대해 상대적인, 그리고 비판들을 이겨내는 안철수의 힘”로 풀어쓸 수 있다. 안철수 자신이 아니라 그의 힘이다. 정확히 말하면 안철수의 지지율, 즉 안철수 현상에 대한 분석인데 문제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서 민주통합당과 그 경선후보들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안철수가 지지 못할 정도로 흠결있는, 비판받는대로의 인물이 아니다. 현재의 높은 지지율에 타격을 줄만한 공격이 아니라고 말하고나서 그 경쟁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 구조는 결국 강준만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이유가 소거법임을 뜻한다.

초반 8장은 안철수가 아닌, 안철수에 대한 비판자들에 대한 글이다. 소거법이라면 일단 민주통합당 예비후보들의 결격사유를 거론하여 탈락시킨 다음에, 안철수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순서로 쓰는 편이 논리적이다. 하지만 강준만은 일단 안철수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는 글들을 먼저 배치해서 안철수에 대한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덕분에 첫 페이지부터 대량의 안철수 비판론들을 접해야 해서 읽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머릿말에서 안철수 현상에 대한 관심이 있을 뿐이며 그를 하나의 도구로서 이용하고자 한다는 강준만의 멘트가 없었다면 거대한 답문집 정도로 여길 수 밖에 없는 구성이다.  이는 책의 주제를 독자들의 시선을 안철수로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한 사실상 결과론에 가까운 지지이유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준만을 본받아 우선 내 입장을 밝히자면, 나는 안철수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가 유일하게 이론적으로나마 인정한 비판(42페이지)인 정당정치를 중시하는 최장집류의 입장이며 이에 더해 대규모 기부로 민심과 관심을 사는 금권정치적 행태 때문에 대선후보로서 부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강준만은 이에 대해 현실적으로 현재 한국에서 정당정치가 제대로 기능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인가 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 정당정치가 되돌리기 힘들 정도로 어그러진 치명적 순간으로 열린우리당 분당을 꼽는다. 이는 그의 말이 옳다. 후반부의 민주통합당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생각하면 더욱 암울한 상황이다. 정당에서 훈련과 경험을 쌓아 정치적 능력과 지지를 키워나가는 코스는 밟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민통당 경선 후보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나마 손학규, 김두관은 지자체장을 맡아 경험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왜 안철수인가?

지지율 때문이라는 강준만의 입장은 확고하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정치판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이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를 기존 정치판의 문법으로 해석해서도 곤란하고 틀리다는 이유로 매도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말한다. 불통에 대해서는 박근혜까지 끌어들인다. 어느 정도는, 아니 매우 결과론적인 입장이다. 지지 즉 힘이 있으니 시대의 의지라고 한다. 디지털 문명을 거론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체화로서 안철수의 지난 행적과 발언들을 이야기하지만, 핵심을 정리하자면 바로 지지율 뿐이다. 여기서 강준만은 이미 현실 정치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강하게 드러낸다. 어차피 기존 정치인들이 불신받고 능력도 없다면 어째서 현재 지지받는 아이콘을 부정할 필요가 있는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어차피 민주통합당과의 연립정권이며 최악의 경우라도 관료들이 받쳐줄 것이다. 이러면서 강준만은 자신의 희망을 다음과 같은 말로 압축한다. “나는 우리 국민을 믿는다.” 물론 나 또한 안철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들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최장집류가 아니라면 피로증후군 관련 비판 정도만 경청할 가치가 있고 나머지는 들을 가치가 없지만, 그에 대항하는 근거가 지지율이 높고 말하는 이상이 높다는 이유만이어서는 안 된다.

이 결과론적인 근거가 통하려면 기존 정치판에, 정확히 말하자면 민주통합당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노에게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바로 후반 7장의 시작이다. 가장 최근의 민주통합당 4.11 총선 패배로부터 그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나꼼수, SNS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이 내용들은 틀린 것이 없다. 논할 것도 없다. 그냥 읽으시면 된다. 이념이라 부를 수 없는 진영논리에 갖혀 있는, 행동하는 친노 강경파들에 의해서 어떻게 민주당 내부와 그 지지층이 망가졌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잘 분석한 글은 찾기 힘들다. 또한 멘토는 멘티들이 소비하는 아바타일 뿐이라는 SNS에 대한 비판 또한 탁견이다. 나는 수도권 빈민층의 분리, 폐쇄화가 이 현상들의 원인이라고 보지만, 이 주제는 나중에 다른 글로 다루려 한다. 어쨌든 민주통합당이 직면한 중도지지층의 이탈 – 이는 박근혜도 마찬가지로서 이들은 많은 경우 안철수를 지지한다. – 이 최대의 문제이며 그 원인이 친노의 과격화에 있다는 분석은 옳다. 과격파들의 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당대표경선에서 승리하면서 민주통합당은 20%대 지지율을 넘어설 동력을 상실했다.

강준만은 증오의 정치에 매우 큰 우려를 보인다. 특히 이명박과 MB라는 두 단어 사이의 간격을 내보이면서 극단적인 이명박 공격에 나서는 과격파를 걱정한다. 이들은 당내외에서의 활동력으로 민심을 왜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중도층까지 격렬하게 공격함으로서 중도지지층의 이탈에도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포함해서, 중도층을 경멸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설득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친노 과격파를 포함하여, 이러한 증오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것이 시대정신이 될 것이라 말한다. 내 의견이지만 친노의 과격화는 대부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 해결하기가 매우 난망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강준만이건만 그는 이 지점까지는 적지 않고 민주통합당 바깥에서 안철수를 지지하는 것으로 그 증오시대를 끝내고자 한다.

이러한 강경파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문재인이다. 이 책에서 영남 후보론에 대한 비판 바로 다음에 문재인이 나오는데, 당연한 순서다. 결국 노무현 어게인을 외치는 이들을 비판하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역주의 완화정책이 헛다리 짚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중앙 집중과 이로 인한 한국 지역들의 부족화인데 정치적 구조조정만을 통해서는 이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또 하나는 친노 강경파들에 대한 호남의 인식 변화다. 특히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전북에서조차 친노에 대한 반감이 높다는 것은 강준만도 지적했지만, 같은 지역 출신인 나 또한 잘 느끼고 있는 일이다. 문재인 개인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나꼼수, 미권스 등의 친노 강경파인 이상 호남에서 지지를 얻기란 힘들다. 일단은 여론주도층에서만 흐르는 이 기류가 여론조사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흐름이 언젠가 확산될 것은 확실하다. 괜히 호남에서 투표율이 곤두박질치고 박근혜 지지율이 생각보다 높게 나오는게 아니다. 더 나아가 강준만은 호남인들에게 중앙에서의 집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말고 체제변혁에 나서야 한다는 호소까지 한다. 온라인 극우파들이 호남을 모멸하는 발언을 잇는 것도 호남이 중앙권력에 참여보려고 저자세를 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곁들인다. 그렇다. 호남이 지지하는 (그러나 배신당했던) 영남후보론의 폐기다. 호남과 중도층의 지지를 모두 잃으면서 어떻게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가?

손학규에 대해서는 매우 높이 평가한다. 다만 그는 친노 과격파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서, 현 민주통합당 내부 경선 통과가 불확실하다고 본다. 강준만의 분석이 옳다. 손학규는 정동영만큼 성큼성큼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충실하게 준비를 해 왔는데, 영남후보론과 친노 강경파 때문에 당내에서조차 주목받기가 힘든 처지다. 분당 보선에서도 승리했고, 본선 경쟁력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고 나는 보지만, 당내 경선이 먼저다. 김두관은 룰라론에서 높게 평가되지만 무소속이었던데다가 LH공사를 둘러싼 전북과 경남의 충돌에서 (경남지사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경남에게 완벽한 승리를 안겨줘서 대선후보로서는 힘들지 않은가라고 보았다. 딱히 뭐라 평가할 여지는 없다. 그리고 간략히 지난 대선의 BBK를 답습해 박근혜에 대한 네거티브에만 매달리려는 민주통합당에 대한 비판으로 후반을 마무리한다.

어째서 결과론에 가까운 높은 지지율의 후보를 지지하는가. 강준만은 맺음말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 비상한 상황, 민중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 언제 홍수처럼 세상을 쓸어버릴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대중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있는 지도자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7년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로도 읽힌다. 현 대한민국의 정치가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강준만은 실제 혁명이란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비상사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 체제 변혁이 시급하며, 이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힘을 안철수는 가지고 있다. 그를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뢰를 가지고 국민을 믿자는 말로 나에게는 읽혔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며 강준만은 책을 끝낸다.

나에게 가장 걸렸던 점은, 그러한 변혁의 기대를 한 인물에게 인격화personalization시켜야 하나? 라는 점이다. 그는 어떠한 조직도 체계도 갖추지 못한 한 개인일 뿐이다. 이게 노무현 때문,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라는 비판과 증오도 이러한 인격화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증오를 이겨내자면서 중도적 성향을 보인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한 개인에게 집중하자는 것은, 강준만이 지적한 노무현의 지역주의 해결책처럼 구조적인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강준만도 인정하듯이 안철수는 예외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인격화 문제의 예외는 아니다.

안철수의 힘을 도구로서 이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안철수를 믿고 그의 힘을 빌려쓰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개인에게 정치적인 힘을 집중시키는 것은 이나마 이뤄놓은 절차적 민주주의 시스템을 다시 해체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침묵이 높이 평가되고 단지 이미지로만 인기를 얻는 이 인격화가 극단으로 가면 결국 파시즘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새 시대의 총아이자 공동체가 체화된 인물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것이 파시즘이고, 이러한 한 개인에게 너무 큰 의미와 기대를 거는 것이 파시즘의 시작이었다. 안철수 개인의 호불호는 제쳐두고 인격화 자체가 우려스럽다.

강준만이 이러한 내 걱정들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승리하기 위한 길을 택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더이상 망가지기 전에,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 전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것이 아무리 위험한 것일지라도 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강준만의 의지를 보았다. 그는 강하고 결연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는 아마도 대선 투표일 바로 전날까지도, 어쩌면 당일까지도 이 책을 옆에 두고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나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민주통합당 후보경선에 참여하여 손학규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민족의 근대화에 대한 단상.

– 예전에 써놓고 공개하지 않았던 글인데, 그 때는 더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괜찮겠다 싶어서 공개합니다.

조선-한국의 근대화 논의를 보면서, 나는 혜초 선사와 소중화(小中華)를 떠올린다. 우리나라 제헌사(헌법 제정 역사)를 보면 독일에서 법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줄줄이 나온다. 이승만이 (말그대로) 깽판을 쳐서 그렇지, 제헌 헌법 초안들은 후일 독일 기본법(독일헌법의 정식명칭)보다 나은 부분이 있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부분들이 많았다. 이는 일본이 패전후 메이지 헌법을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하도록 바꾸질 못해서 맥아더 휘하 극동사령부가 사실상 현행 일본 헌법을 작성했던 것과 크게 비교된다. 학문적 깊이야 일본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조선인들은 현대적 헌법을 스스로 (독일 이론을 베껴오던 어쨌든 간에) 작성할 정도의 역량은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혜초 선사는 천축에 가서 불법을 배웠고, 조선은 소중화를 외칠 정도로 유학을 번성시켰다. 그러한 전통 속에서 한국은 독일에서 직접 법학을 배워온 학자들이 독일이론에 입각해 헌법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한국인들은 지주-자산가 계급일수록 유학 보내기에 열을 올렸는데, 유교적 전통이 파괴된 식민지 조선에서 그 대상은 일본을 통한 서양 문명이었다. 광복 후 이는 미국으로 강력히 집중된다. 구 일본제국은 한반도에 이런저런 인프라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관동군으로부터 인적, 정신적으로 승계된 군사국가주의문화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다. 박정희는 식민지 조선을 만주국 스타일의 공업군사국가로 개조해갔다. 그렇다 할지라도 한국은 광복부터 지금까지 小美國을 지향하는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거의 모든 인프라가 파괴되었어도 인재와 지식은 남아있었고, 능력이 되는 이들은 미국으로 수도 없이 유학을 떠나고 문물들을 들여왔다. 다녀오지 못하는 이들은 군수지원이든 기독교 선교사들이든 쓸 수 있는 연줄은 모두 동원해서 미국을 배우고 따라하는데 열중했다. 결국 한국의 현대사는 만주국을 지향하는 관동군 문화와 소미국을 지향하는 민간인 문화의 격렬한 충돌사라고 볼 수 있겠다.

블로그 이전 취소했습니다.

오랫만의 포스팅이 블로그 이전, 그리고 그 취소 글이라 부끄럽습니다. ^^; 이전할까 했는데 이 것도 상당한 일감이라서 계속 눌러붙어 있기로 했습니다. 포스팅도 좀더 정기적으로 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방문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학생폭력대처에 대한 단상.

학생폭력범죄는 성범죄와 유사하다. 피해자의 고발, 증언을 얻는 것이 쉽지 않으며, 또래들의 집단 내에서 일어나기에 객관적인 증거, 증인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피해자가 유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그러하다. “저 여자가 원래 문란하다.”와 “쟤는 맞을만해요.”가 얼마나 다른가? 거기에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후진적 인식 또한 성범죄 – 특히 성희롱 -의 그 것과 매우 비슷하다. 한국은 성범죄율이 상당히 높은 국가이지만 성범죄에 대한 인식과 처벌이 향상되어 가면서 그나마 좀 줄어가는 추세다. 그렇다면 성범죄에 대한 대처방법 또한 학생폭력 범죄를 다루는데 있어서 큰 참고가 될 것이다.

폭넓고 강제적인 폭력방지교육이 필요하다. 한국 법률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용주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참고) 강간, 추행 등의 강력범죄는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범죄로 인식하지만 성희롱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까지 처벌받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교육이 필요했다. 이는 가해자가 스스로 자제하도록 하는 효과 이상으로, 피해자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지식과 논리를 배우는 효과가 더 크다. 이게 참고 넘어갈 일이 아니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이상 참지 않게 된다.

전문대책인력이 필요하다. 성범죄의 경우에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 여성 경찰관이 대화하도록 되어 있고, 수사-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들이 마련되어 있다. (사실 언제나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폭력범죄의 경우, 교사는 이미 감독의무를 방기했었기에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고려해 은폐하려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담임교사는 1년만 문제없이 진급시키면 책임에서 벗어나므로 이러한 인센티브 구조하에서 교사들이 은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폭력 피해자에 대한 카운셀링 능력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심리치료에 능숙하고 폭력예방/저지에 인센티브를 받는 전문인력이 확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증거, 증인에 대한 요구는 너그러워져야 한다. 성범죄의 경우, 꽃뱀이라는 새로운 범죄(정확히는 공갈, 무고죄로 해석될 것이다)가 등장할 정도로 증거에 대한 입증도가 낮아져 있다. 학생폭력에 대해서도 집단 폭행, 장기간 협박 등의 한정된 사례에 한해서라도 처벌의 폭을 넓히고 입증도를 완화시켜야 한다. 특히 문자, 통화내역 등 휴대전화와 메신저 등의 인터넷을 이용한 협박, 공갈 등에 대해서 폭넓게 증거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엄격한 처벌이 필수다. 성인범죄에 대한 처벌 중 하나인 접근금지명령에 더해서 가해학생들만을 따로 모으는 특수학교제도도 가능하다. 폭력가해자라는 언급을 학생기록부에 남기도록 강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미성년자는 충동절제능력이 떨어지고 교화의 가능성이 큰 만큼 성인의 폭력범죄에 준하는 처벌을 가할 수는 없지만 형사처벌이 아닌 진학, 생활상의 불이익은 필요해 보인다. 또한 무엇보다도 교사, 교장 등 학교에 대한 불이익도 강화해야 한다. 성희롱도 고용주가 가해자에게 징계를 가하지 않을 경우에는 과태료를 부과한다. 형사처벌은 힘들다 할지라도 교사의 경우에는 진급과 급여에서, 학교법인에는 경제적, 명예적 불이익을 주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특히 교화가 불가능한 환경이 많아지고 있는 최근의 상황에서 특수학교제도는 다시 한번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따라는 단어 자체가 폭력성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국가와 사회는 최근 10년간 성평등과 성범죄 감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이는 기본적 인권향상과 더불어 여성의 경제활동을 통한 새로운 노동력의 확보라는 실질적인 이유가 컸다. 그럼 학생폭력은? 이번 대구폭력자살사건에서 보이듯이 어린 학생 피해자들은 의욕을 잃고 성장과 학습에 지대한 피해를 입는다. 안그래도 부족한 어린이들을 망쳐서야 한국의 미래는 없다. 기본적 인권을 더해서, 이러한 (예비)피해자들을 건강하게 자라도록 보호하는 일은 실리적인 이유에 있어서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 근 3달만의 포스팅이 이런 암울한 내용이어서 매우 슬프다.

– 희생당한 모든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아이유는 아이돌로 가네…

이번 달에 있었던 한류 콘서트 동영상에서 아이유IU의 공연을 봤다. 머뭇대지만 노래로 어필하던 어린 싱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바짝 마르고 율동과 표정연기에 숙달된 아이돌이 있었다. 메이크업과 패션도 골수 아이돌계로 변신. 사실 연출을 아이돌로 하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어차피 아이돌로 소비되기도 했고… 문제는 말랐다며 사진들이 인터넷에 떠돌 때부터 염려하던대로 체력저하 때문일 것 같지만, 가창력이 확실히 떨어져 있었다. 고음은 갈라지고 날 놀래켰던 힘있던 저음은 가느다랗게 나오는 시늉만 한다. “있잖아”를 부르는 아이유가 불쌍해보일 정도로 부족했다.

새 앨범이 올해 말, 즉 한두달 내에 나온다고 했는데 내가 본 공연(단 2곡)만에서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번 앨범은 기대를 접어야 할 듯. 아니면 아예 곡들부터 모두 아이돌 노선으로 가려나? 음… 걱정된다. 뭐 곁에 있는 우글우글한 뮤지션 선배들이 잘 조정해줄 것 같으니 그렇게까지는 걱정되지는 않는데 좋은 가수가 아이돌로 인기 끄는 것에 너무 홀리지 않았으면 하는 기분이다.

– 사실 뱃심이 떨어지는 건 익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얼굴에 색기가 돌기 시작한 건 조금 놀라웠다. 아니, 나이도 그렇고 별 놀라운 일은 아니긴 한데 삼촌팬 마음이 어디 그렇나…;;; 몸무게를 좀더 늘려서 체력을 보강하면 섹시어필도 얼마든지 가능할 듯. 하지만 어려운 춤추기엔 지은양 운동신경이 … ^^;;;

– 일단은 빠듯한 일정의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체력이 걱정되기는 한다.

애플 아이폰4S 단상: 디스플레이 전쟁, 시작되다.

이번 아이폰은 다 업그레이드되었는데, 단 하나 디스플레이만 아니어서 4S가 됐다. 디스플레이가 안 바뀌니 기구물(프레임)도 바뀌어봤자 모양도 별 차이없어서 어쩔 수 없이 4S로 이름붙인 듯하다. 사실 3G시절부터 4S까지 얼마나 큰 업그레이드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이번 4S가 딱히 5라 부르지 못할 정도로 마이너 업그레이드는 아니다. 삼성 이재용 사장의 커멘트를 고려해보면 삼성에서 차세대 디스플레이 대량공급을 거절해버린 모양이다.

LCD업체들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LG와 일본업체들이 공급하는데, 같은 해상도의 4인치면 픽셀 피치가 틀려져서 생산라인을 대량수정해야 하는데 0.5인치 확대에 그럴 메리트가 있는가? 같은 dpi로 크기만 키우는 것도 패널 생산성+ 앱 호환성 문제가 생긴다. 레티나만 해도 생산성에 문제가 많았는데, 그 이상 해상도라면 과연 애플이 필요로 하는만큼 대량생산이 가능할지도 의문시된다. 게다가 경제위기인 요즘에 생산라인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기에는 LG도 도시바도 샤프도 자금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 애플의 투자는 1년 정도밖에 안 됐고 생산라인에 영향을 끼치려면 아무리 빨라도 1년이상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것도 신 패널 개발이 잘 진행된다는 전제 하에.

어떤 분께서는 LTE망의 확산을 기다리느라 5가 아니라 4S라 하시던데, 그보다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확보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3->4도 3G망 내에서 했는데, 굳이 5를 LTE용으로 발매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LCD는 생산과 개발 기술 모두에서 일시적이나마 한계에 와 있고, OLED는 삼성 모바일 디스플레이 외에는 당장에는 대량생산이 힘든 상황이다. 다만 LCD 진영에서는 레티나를 두 세대 아이폰에서 사용하면서 자금과 시간 여유를 가질테니 이들이 어떤 대응(OLED양산까지 포함해서)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애플의 아이폰5가 출시될 것 같다.

이번에 삼성은 디스플레이를 무기로 대단한 호기를 맞았다. 애플이 여전히 레티나에 머무르는 동안 갤럭시 시리즈에 온갖 OLED 패널을 적용해서 대중의 아이폰 프리미엄을 깎아낼 절호의 찬스가 온 셈이다. 그리고 애플과 삼성의 밀월시대는 확실히 끝났다.

애플은 이번에는 당했지만 디스플레이에서 계속 밀릴 수는 없다. 애플의 고객 충성도는 한세대 정도 디스플레이 향상이 없다고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고, 애플의 현금과 주문량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모바일 디스플레이 시장을 대대적으로 재편할 힘이 있다. LG와 일본업체들도 모바일에서 살아남으려면 애플의 주문이 필수적이다. 어느 업체가 애플에게 선택되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업체들은 도태되는 것도 각오해야 할 지경이다.

애플이 아이폰 5출시를 포기하고 4S로 가면서, 디스플레이가 앞으로 스마트폰 경쟁의 핵심이 됐다. 다 업그레이드 해도 디스플레이가 좋아지지 않으면 완전한 신제품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제공격을 얻어맞은 기업이 바로 현금과 주문량에서 압도적인 애플이다. 모든 모바일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휘말려들 전쟁이 시작됐다.

생면 추천.

요즘 국수를 끓여먹는데 취미를 들였다. 멸치다시마 국물을 직접 내려다가 시간이 없어서 포기하고 만들어진 국수장국으로 끓이는데, 파는 농축액이라고 해도 확실히 라면보다는 국물이 먹을 만하다. 소면으로 하면 끓이는 시간도 별반 차이가 없다.

마트에 갔다가 말리지 않은 생면이 소면으로 있길래 우동면이랑 같이 사와 봤다. 어제 오늘 끓여먹었는데, 소면이 의외로 괜찮았다. 보통 쓰는 건면보다는 두껍지만 그만큼 씹는 질감과 양감이 -소면의 매력은 아니지만- 추천할만했다. 2분만 삶으면 되니까 시간도 아낄 수 있고. 혼자 사는 입장에서는 2인분씩 포장되어서 2-3일 내에 또 먹어야 한다는 점이 불편하긴 하지만 크지는 않다.

생 우동면은 … 이젠 미리 삶아져서 진공포장으로 파는 인스턴트 우동면은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삶는 시간은 5분 가량 + 넘치지 않도록 보고 있어야 하니 약간 더 귀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들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사실은 국물을 내보고 싶은데, 이것만큼은 시간과 화력이 모두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양지를 푹 끓인 베이스 국물을 얼려두고, 먹기 전에 야채들을 몽땅 넣고 끓여서 후추 넣으면 상당히 깊은 맛의 국물이 되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무리. 하지만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꼭 만들어보고 싶은 국물이다.

부산까지만 국제급 대도시인가?

링크: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세계대회라 하기엔… 운영 ‘실격’ – 한국일보

대구광역시는 한국 인구수 제4위의 대도시다. 인천이 수도권 – 서울의 항구이므로 도시권역을 고려하면 사실상 3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도시가 전력으로 준비했다는 국제 스포츠 행사가 상당한 불평을 사고 있다는 기사다. 인천이 2014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심각한 재정악화로 문제가 되고 있는 사정까지 생각하면,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의 항구인 부산까지만 국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대도시인가 싶어서 씁쓸하다. 영암F1이 무리한 지방의 행사유치로 지탄받고 있지만, 대구 정도의 대도시도 국제 스포츠 행사 잘 치르는 건 아니지 않는가? 어느 쪽이 낫다 잘한다 하기 이전에 다들 무리한 유치를 했으며, 그 근본원인은 한국의 수도권 집중현상에 따른 지방의 몰락에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이번 육상선수권대회다.

– 자 그럼 평창 동계 올림픽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